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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영화 벌새, 기억의 공유가 위로가 된다

 

벌새
영화 '벌새' 포스터

 

1994년의 나를 만날 수 있는 영화

영화 '벌새'는 1994년 서울 대치동에 사는 중학생 은희의 구체적인 일상들을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또한 그 시대의 주인공과 같은 중학생이었던 사람으로서는 잊고 있던 전생을 만난 듯 반가운 영화이기도 했는데요. 1994년 당시의 유행하던 브랜드, 사건들, 분위기 등이 고마울 정도로 남아있는 기억과 흡사해서 잃어버린 나를 찾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시작은 다급하게 초인종을 누르는 소녀의 뒷모습과  절대 열어주지 않는 현관문을 보여줍니다. 그 외의 정보는 없기 때문에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보다 하고 긴장하고 봤는데요. 곧 902호라는 호수를 은희의 시선에서 보여주고 다시 대사 없이 한층을 올라가 1002호에서 문이 열립니다. 은희는 엄마의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이었는데요. 대수롭지 않게 시든 시금치 얘기를 하며 문을 열어주는 엄마와 짜증과 당황이 섞인 은희의 표정이 대조됩니다.

 

사실 이 첫 장면부터 어린 시절과 겹쳤는데요. 이상하게도 그 시절에 은희처럼 복도식 아파트에 살면서 심부름을 하던 길, 너무 보고 싶었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오던 길에 심지어 다른 동 같은 호수에 가서 문을 두드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뭔가 하나에 꽂히면 다른 게 크게 중요하지도 않고 자세히 보이지도 않아서 그런 실수를 종종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아파트가 숫자를 의식해서 보지 않으면 다 똑같아 보인다는 생각을 자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 벌새'의 주요 장소는 학교, 집인데요. 은희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로 보입니다. 자세히는 안 나오지만 성격적인 것 때문이 아니라 환경 등에 의해 친구들이 나눠진 게 아닐까 싶었는데요. 그런 은희가 손에 쥔 모토로라 삐삐에는 1004 486 486이란 숫자가 찍힙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너무 많은 추억이 떠올라서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의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뒤늦은 위로

영화 '벌새'는 은희의 에피소드가 주를 이루기는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갑니다. 먼저 밤늦게 술을 마시고 찾아오는 외삼촌이 그러한데요. 아마도 그는 평소에 말이 없는 사람인데 그나마 술을 마셨기에 여동생의 집에 찾아와 마음속에 있던 말도 할 수 있었겠지요. 인상적인 장면은 어쩌면 너무 평범한 장면일 수도 있겠지만 외삼촌이 문을 잘 못 여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신은 그 시대를 나타내는 이야기라기보다는 현재도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요. 온 가족이 서먹하게 외삼촌의 배웅을 위해 그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때 은희가 문을 열어줍니다. 그때 나는 어땠더라 하는 생각이 들고 주인공이 이런 상황에서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라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은희네 집은 떡집을 하고 있습니다. 바쁜 시기에는 온 가족이 가게 일을 돕는데요. 공부를 못해서 아빠에게 미운털이 박힌 언니, 그런 언니와는 대조적으로 외고를 준비하고 있는 오빠, 소심하게 눈치를 보는게 익숙한 은희, 가부장적인 아빠, 늘 지치고 한이 많아 보이는 엄마가 가족 구성원입니다. 아빠는 아마도 가족들에게는 엄청난 잔소리를 하지만 정작 본인은 춤바람이 난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런 아빠와 오래된 억눌림이 불행으로 굳어버린 엄마는 자주 다투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부모의 다툼이 심해지면 아이들 셋은 싸우는 당사자들보다 훨씬 더 큰 두려움을 느끼는 듯합니다. 이렇듯 은희는 화목한 가정은 아니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일상을 보내고 있고 그런 가라앉은 생활을 영화는 계속 보여줍니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마음 둘 곳이 없어 보이는 언니, 아빠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억지로 공부를 해야만 하는 오빠는 사실 은희만큼이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은희는 남자 친구가 있는데요. 어느 날은 오빠가 그 둘을 목격을 했는지 은희를 불러 잔소리를 하고 그에 까칠한 반응을 하는 동생을 때립니다. 영화 속에는 실제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자주 있던 일인 듯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은희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지숙한테 자살에 대해서 언급을 하기도 하는데요. 자신이 때리는 오빠를 원망하는 유서를 쓰고 죽는다면 부모님이 많이 슬퍼하시고 오빠가 많이 혼나지 않을까 합니다. 하지만 지숙이 우리한테 미안한 사람들이 있긴 할까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어둡디 어두운 마음이 느껴집니다. 

 

중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많이 했던 생각 중에 하나가 내 주변 사람들 중에 누가 날 가장 많이 사랑할까였던 것 같은데요. 은희는 가족들에게 그런 기대를 버린 지 오래지만 귀 밑에 혹이 생겨 수술을 하게 되면서 부모님의 뜻밖의 모습에 미소를 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은희랑 함께 병원에 간 아빠가 뜻밖에 소리 내어 우는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는 듯 했고요. 또한 그날 저녁 엄마가 자신의 밥 숟가락에 고기반찬을 올려 줄 때도 은희는 미소를 짓습니다. 자신이 곧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부작용으로 안면 마비가 생길지도 모르는 수술을 앞두었는데도 말이지요. 아마도 중학생이라는 시절은 사람 사이의 교감이나 감정에 온 신경이 가 있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소중한 은희에게 남자 친구의 배신이나 유리의 돌변, 지숙의 뻔뻔함 같은 것은 충격일 수밖에 없는데요. 사실 그 셋도 자세히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서사와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관계에서 계속 상처를 받는 은희에게 한문 선생님 영지가 나타납니다. 영지는 굉장히 이상적인 사람이면서도 담담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묘한 매력이 있는 캐릭터인데요. 선생님이지만 일방적인 대화를 하는 모습은 볼 수 없고 같이 있으면 은희의 슬픔까지 흡수해서 위로로 되돌려주는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은희는 그런 영지에게 빠져 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드디어 나타난 빛과 같은 존재인 영지는 갑자기 떠나고 가슴 아픈 사건의 주인공으로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영화 '벌새'에서 가장 놀랐던 것은 그때 당시의 물건들이랑 상황들이 거의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노란색 베네통 가방, 모토로라 삐삐, 둥글게 말린 앞머리, 교복 속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트램펄린을 타는 모습, 노래방, 손편지 등등입니다. 그리고 그런 물리적인 재현뿐만 아니라 당시에 내 주변에도 있었던 캐릭터들도 반가웠고요. 또한 영화의 결말로 가게 되면 실제 일어났지만 아직도 믿기 힘든 성수대교 붕괴로 인한 충격과 슬픔에 대한 묘사도 나오는데요. 영지가 은희와 나누었던 말들과 편지에 담겨 있던 글들이 겹쳐지면서 이제는 좀 더 어른스럽게 아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벌새 / House of Hummingbird, 2018
감독 : 김보라 주연 : 박지후(은희 역), 김새벽(영지 역)

개봉 : 2019.08.29
장르 : 드라마
국가 : 한국
등급 : 15세이상관람가
러닝타임 : 13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