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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허공에의 질주_여전히 아름답고 먹먹하다

17살, 리버 피닉스

영화 허공에의 질주를 생각하면 리버 피닉스, 대니, 17살, 베토벤..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영화 시작할 때부터 나오는 피아노 연주.. 아직도 이 음악이 시작되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또한 20여 년 전 처음 본 후 많은 게 변했지만 이 영화를 볼 때의 감정만은 그대로라는 게 신기하다.

 

예전에는 영화 자체보다는 리버 피닉스가 너무 내 취향이라 좋은가 싶었는데 다시 보니 전체적으로 곳곳에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요소들이 많다. 바쁘고 먹고살기 힘든 와중에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 주는 걸 보면 잘은 모르지만 예술매체가 가져야 할 그 무언가가 충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RUNNING ON EMPTY
RUNNING ON EMPTY
RIVER PHOENIX
RIVER PHOENIX

 

계속 바뀌어야 하는 집과 이름, 나

시작은 먹먹한 피아노 연주와 함께 차선이 그려져 있는 도로를 바라보는 달리는 차 안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서는 이미 세상에 없는지 오래된 리버 피닉스, 대니가 건강한 모습으로 야구를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은 난 여기서부터 슬프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기도 하고 현실과의 과도한 괴리와 격렬한 아쉬움이 쏟아져 나와서.. 

(다시 영화로 와서)
대니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집으로 가는 도중에 낯선 차들의 미행을 눈치채고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이동한 다음 동생 해리를 데리고 부모인 아서와 애니에게 간다. 대니는 "사복 경찰에 차 두대, FBI예요"라고 말하면서 차에 올라탄다. 

 

나무건반
나무 건반으로 피아노 연습하는 대니
염색하는 대니
거울을 보면 내가 아니고 6개월마다 이름을 바꾸니까..

 

아서와 애니는 1971년 네이팜탄 투하 반대 시위 중 폭탄 연구소를 폭파시켜 (예정에 없던) 경비원을 실명하게 만든 혐의를 받으며 도망 다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이름이랑 머리 색을 바꾸면서 새로운 장소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는데 대니의 새 이름은 마이클이다. 도주는 6개월 정도의 단위로 이뤄지고 있고 다른 가족, 친구들은 거의 만날 수가 없어 오로지 4명의 가족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마이클
네 이름이 뭐니
대니
우리끼리.. 살아야해

 

아서는 갑작스러운 이주로 동료에게 도움을 받는 중에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잠시 멍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삶을 살고 있기에 내면에 슬픔과 불안을 꾹꾹 눌러 담고 생활을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런 삶을 사는 것은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나머지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릴 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대니(리버 피닉스)에게 눈이 멀어서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보니 가족의 의미에 많은 비중을 두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보는 내내 20년 동안 수시로 도주를 하며 아이까지 있는 가정을 지키는 것은 대체 어느 정도의 중량을 감내하는 삶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비록 영화이긴 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무게를 견뎌내는 생활에서도 가족들의 대화에 간간히 나오는 유머가 인상적이었다. 

 

음악시간
베토벤에는 춤을 출 수 없지 않나요
베토벤 비창
베토벤의 비창 연주

 

새로운 학교에서 음악 시간에 필립스 선생님이 대니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리버 피닉스가 베토벤의 비창을 연주하게 된다. 클래식의 클 자도 모르던 내 귀에 그때 당시엔 베토벤이 세상에서 젤 내 취향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는데 심지어 대역도 아니었다고 한다.

 

 

피아노연주
대니와 로나의 첫 만남
바닷가에서
난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대니가 피아노를 치기 위해 필립스 선생님 집에 방문하면서 그의 딸인 로나와 가까워지게 되고 서로 좋아하게 된다. 그러다가 로나가 애니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게 되면서 가족과도 인사를 하게 되고 둘 사이가 더 가까워지려는 순간, 대니는 주저하게 되고.. 로나의 오해로 서로 괴로운 시간을 잠깐 보내다가 대니가 가족에 대해 고백하면서 더욱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생일파티
힘을 내요, 샘
대니의 고백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사랑해

 

이 장면에서 대니가 로나에게 고백을 하기 전 주저하는 모습이 어찌나 마음을 아리게 하는지.. "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 하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털어놓는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동안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해 줄 수 없었던 미안함을 내내 담아두고 있다가 하게 된 진심 가득한 고백이니까.

 

줄리아드
줄리아드 음대 입학 시험에 참석하는 대니
피자 배달
피자배달원으로 할머니를 찾아가는 대니

 

그리고 대니의 줄리아드 음대 특별전형 시험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재능을 인정받을 때 먹먹하면서도 벅찬 느낌을 준다. 대니가 모처럼 신이 나서 피자 배달원으로 가장하고 할머니에게 찾아가는 신에서의 리버의 표정 또한 눈물짓게 만든다. 대사가 많지도 않으면서 어떤 행동, 표정만으로 심정을 이해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보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울림을 주는 건 어떤 이유일까.. 

 

엄마와연주
엄마와 아들의 연주
아버지
넌 어리고 재능있었고 아름다웠다..

 

사실 지금보다 더 철없던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은데 이번에 다시 보면서 많이 울었던 장면은 애니가 대니를 위해 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이었다. 14년 만에 보는 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아버지의 심정이 나랑 거리가 먼 캐릭터임에도 너무나 몰입이 되었다. 그리고 손주인 대니를 맡게 되면 앞으로 자신의 딸은 더더욱 볼 수 없게 될 걸 알지만 애니의 부탁을 받아들인다..

 

안녕
잊을 수 없는 눈빛
마지막
우리 모두 널 사랑한다

 

흉내 낼 수 없는 진심에서 오는 감동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리버 피닉스, 대니.. 이 단어들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이렇게까지 유효하다니 놀랍다. 하루하루 버티기 바빠서 어떤 것에도 감흥이 없나 보다 했는데 식상한 표현이지만 아직도 이렇게 울림을 주다니.. 영화 속 가족들을 보면서 관계란 이래야 하는데.. 대니를 보면서 일단 사람은 말이 없어야 하고 그 말들을 마음속에 곱씹다가 진심만 내뱉어야 멋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나의 관계들, 내가 뱉는 말들에 부끄러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일단 난 자체로 멋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말을 좀 많이 줄이고 생각을 많이 해서 걸러져 나온 말들만 내뱉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허공에의 질주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서 상영하길래 가던 길을 멈추고 혼자 들어가서 봤던 적이 있었는데 피아노 음악이 나오는 도입부부터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바빠 죽겠는데 내가 왜 갑자기 여기 와서 울고 있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세상엔 어쩔 수 없이 슬프고 아름답고 먹먹한 그 무엇이 분명히 있고 그건 똑똑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하니 왠지 다행스럽다.

 

허공에의 질주 / Running on empty, 1988 , 미국, 115분
출연 : 리버 피닉스(대니), 크리스틴 라티(애니), 주드 허쉬(아서), 조 나드 애브리(해리), 마샤 플림튼(로나)등
감독 : 시드니 루멧 / 음악 : 토니 모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