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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책

「일기」 황정은 에세이

「일기 」 황정은, 창비 2021

 

건강하시기를


황정은 작가의 「일기」를 다 읽었다. 퇴사하는 날 나에게 주는 선물처럼 서점에 들러 구입한 지 두 달 가까이 지난 이제야 다 읽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둔 궁극적인 이유는 일이 하기 싫어서였겠지만 회사에는 집에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서라고 했고 내가 나한테 부여한 이유는 내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부끄러워 서였다.

그리고 집에 와서 마지막 인사를 메시지로 보내면서 이 책 표지의 영향이었는지 건강하시라는 바람을 보냈다. 건강하라는 말은 잘 지내라는 말보다는 왠지 더 정성이 들어간 말 같아서 그리고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니까 마지막 인사로 적절한 것 같다.

황정은의 예전 책에서도 건강하시라는 이 말은 나도 몇 번 봤던 기억이 있다. 흔한 말이었을 텐데 그때도 왠지 다른 말처럼 느껴져서 이게 원래 이렇게 진지하게 느껴지는 말이었었나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일기」를 읽기 시작하는 첫 장에서 그 말에 대한 작가의 바람이 담긴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착하고 따뜻하고 사려 깊은 관계가 있는 세계

 

난 원래 책을 거의 안 읽었던 사람이라 황정은의 책도 처음 읽은 것은 5년 정도 전인데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백의 그림자」였던 것 같다. 아마 읽기 시작만 하고 다 읽은 것은 그 후 몇 년이 지나서였을 것이다. 누군가와 끝도 없는 대화를 해야 하는 나의 일은 상대의 말보다 내 형편없는 말에 늘 날 답답하게 했다. 그런 병적인 나의 답답함이 점점 심해질 때 백의 그림자를 책상 위에 두고 틈나는 대로 그 세계에 들어갔다.

무재 씨와 은교 씨의 세계에 들어가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부끄럽지 않은 대화에 나도 잠시 속해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었다. 현실에선 그런 따뜻하고 착하고 배려있는 대화가 없지만 책 안에 서라도 그런 관계를 목격할 수 있어서 그 시기에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 황정은의 소설이 나에겐 공기 같은 역할을 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일기」를 읽으면서 나에게 한때 산소 같았던 「백의 그림자」 얘기가 나와서 반가웠다. 그리고 이 작가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내가 왜 이 책을 바로 안 읽었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빨간 머리 앤에 대한 얘기도 나오는데 다른 알지 못하는 책의 제목을 언급할 때와는 달리 아는 것이고 나도 무척 좋아했던 것이라 또 반가웠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언급되었던 「야만적인 앨리스 씨」와 「소년」도 나를 가슴 뛰게 했던 소설들이다. 너무 좋아서라기 보다는 소설인데도 너무 깜짝 놀랄 만큼 생생하게 마음이 아파서이기도 했고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쓰지 하는 놀라움도 있었던 것 같다. 책이 눈으로만 읽히는 게 아니라 목 안쪽에서 문장들이 타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소년들의 형상이 자꾸 아프게 상상이 가기도 했다. 나는 그 정도의 강렬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은 대체 어떤 소설이 타길래 그런 타이틀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황정은의 책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사실 읽을 때마다 그 안에 있는 높은 도덕성의 세계에 난 속한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에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 에세이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슬픈 사건들, 환경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 문장들에서 난 거리가 먼 사람인데 내가 읽었다고 말하는 건 안 어울리나 싶기도 하다. 난 사실 아직도「계속해보겠습니다」의 괴물처럼 표현된 엄마에 더 가까운 사람 같아서 주변에 많이 미안하지만 그래도 좋은걸 어쩌나 싶기도 하다.

요즘엔 너무 감정적인 내가 스스로 힘들어서 달리 살아볼까 하고 자기 계발 서적을 읽으려고 노력 중인데 아무래도 읽기가 너무 힘들어서 책 잘 읽는 법의 제목의 영상을 찾아봤다. 거기서는 어떻게 하면 책을 오랫동안 잘 기억할까 하면서 방법을 알려줬는데 마지막에 소설은 유희의 목적으로 읽는 것이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읽으면 된다는 식의 내용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가끔 내가 읽은 소설에 대해 얘기할 때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것도 하는 구나란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다.

특히 황정은의 소설을 읽을 때 난 결코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가끔은 숨을 쉬기 위해 가끔은 미소 짓고 싶어서 가끔은 사려 깊은 어떤 관계가 간절해서였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첫 에세이 「일기」를 읽으면서 소설과는 다르지만 비슷한 어떤 마음을 느꼈고 새삼 너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졌다.